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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광수교수님 글
고독을 이기는 방법

고독을 이겨나가려면 우선 '사랑'에 대한 헛된 꿈을 버려야 한다. 
완전한 사랑도 없고 남녀간의 완벽한 궁합도 없고 
진짜 오르가즘도 없다. 
'오르가즘'이란 말은 의사들이 만들어낸 허망한 신기루에 불과할 뿐이다.
사랑의 기쁨에 들떠있는 사람을 부러워하지 말자. 
미혼의 남녀라면 기혼자들이 떠벌여대는 
남편(또는 아내)자랑이나 자식자랑에 속지 말고, 
기혼남녀라면 남들의 가정생활과 자기의 가정생활을 비교하지 말자.
사람들은 다 거짓말쟁이요 허풍쟁이이다. 
다 불쌍한 '자기 변명꾼'들이다. 믿을 사람은 오직 자기밖에 없다.
 
물론 혼자서 살아나가려면 뼈아픈 고독을 감수해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기혼자들이 고독을 덜 느끼는 것은 아닌 것이다.
결혼을 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다. 
결혼하든 결혼 안하든, 모든 사랑은 결국 
나르시시즘적 자.위행위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미리 알아두라는 말이다.

 

취미생활이나 일로 고독을 풀어도 좋고 
그냥 가만히 앉아 시간을 때워나가도 좋다.
이래도 외롭고 저래도 외롭다. 
그때 그때 슬피 울어 고독을 달래도 좋고 
술에 취하여 허망스레 웃어도 좋다. 
요컨대 '완전한 사랑'은 없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희망'을 갖기보다는 '절망'을 택하라는 말이다.
희망은 절망보다 더 무섭다. 과도한 희망은 
과도한 절망을 불러들이기 쉽다.

 

절대로 계산해서는 안 된다. 
연애하고 싶으면 연애하고 결혼하고 싶으면 결혼하라. 
자식을 낳고 싶으면 낳고 낳기 싫으면 낳지 말라.
사회명사들이 잘난척 하며 써 갈기는 '행복론' 따위는 읽기도 전에 찢어버려라.
다들 자기변명이요 대리배설일뿐, 
믿을만한 '고독의 근치(根治)처방'은 없다. 
그것은 종교 역시 마찬가지다. 신(神)의 사랑도 믿지 말라.

 

정 외롭거든 술이나 담배를 자학적으로 마시고 피우며 시간을 달래나가라.
자살할 용기가 있으면 자살해도 좋고, 
바람을 피울 용기가 있으면 바람을 피워도 좋다. 
아무튼 뻔뻔스럽게 운명 아니 신(神)의 '심술'과 맞서나가야 한다.
'고독'이란 결국 '의타심(依他心)'에서 온다. 
의타심을 완전히 버릴수만 있다면 우리는 고독으로부터 당당하게 자유로워질 수 있다. 절대로 '밑지는 사랑'을 하지 말라. 
사랑을 하려거든 이기적인 자세로 빼앗는 사랑만 하라.
그것은 자식에 대한 사랑에서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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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광수 교수님의 시
이번 시는 더 울림이 있다.

슬픈 유족과 조객들을 싣고 장지로 가던 영구차는 

시골길에서 그만 개 한 마리를 치어 죽였다. 
작은 삽살개는 그만 아픔에 못 이겨 
깨개갱거리며 울다가 죽어 버렸다. 
영구차는 잠시 주춤 섰다. 그러나 다시금 목적지를 향해 장중하게 달렸다. 
죽어가는 개를 측은히 여기던 차 안의 사람들도 
차가 한참을 달려 개에게서 멀어지자 
다시금 관 속에 누운 고인을 생각해 내곤 
곧 개의 아픔을 잊어버렸다. 
고인을 위한 슬픔의 무게는 개의 죽음의 무게보다 더 컸다. 
내게도, 멀리서 점점 작아지며 들려오는 개의 깨갱소리가 
마치 바이올린의 고음인 양 아름답게조차 들렸다. 
내게도 고인에 대한 사랑은 컸다. 

며칠 전, 명동 뒷골목에서의 일이 생각난다. 
웬 거지 한 사람이 기운 없이 쓰러져 있는 것을 보고 
난 울컥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기느 들었다가 
아마 술에 취한 녀석일거야 하고 애써 자위하며 
슬쩍 눈길을 피해 지나가 버렸다. 
사실 난 그의 더러운 몸이 내 새 옷에 묻을까 봐 
겁이 났었다 난 귀찮았다. 
경찰이 어련히 잘 돌봐주겠지 생각했다. 
또 나에겐 급한 약속이 있었다. 

확실히 
한여름 대낮, 빌딩의 비좁은 그늘 아래서 낮잠을 자는
지게꾼의 더러운 얼굴에서 난 시를 읽을 수가 없다. 
한 마리 파리가 꾀죄죄 때묻은 그의 표정 속을 지나가고 
헤벌어진 입술 사이론 청계천만큼이나 찐득거리는 침방울이 흘러 내린다. 
아무리 내가 민주주의를 사랑한다고 해도 
더러운 걸인의 몸뚱이를 껴안고 시를 욀 순 없다. 또 
하찮은 개의 죽음을 위하여 눈물을 흘릴 여유는 없다.
고인을 애도하기 위하여, 더 큰 슬픔을 위하여, 다만 
그 차가 영구차이기 때문에 

언젠가, 무겁게 내리누르는 일상의 무게에 짓눌리어 
생활의 무게가, 고생의 무게가 
내게 시를 쓰게 한다고 그래서 
생활의 무게를 감수하겠다고 
비겁하게 공헌하던 것을 부끄럽게 기억한다. 
그런데도 
내게는 개의 아픈 비명이 바이올린 소리처럼 들리고 
그의 아픔이 실감되지 않았다. 
지게꾼의 고통이 실감되지 않았다. 

아아, 나는 모른다. 어떤 슬픔이 더 무거운 것인가를 
생활의 무게와 시의 무게가 어떻게 다른가를 
철학과 생활이, 사랑과 동정이, 신의 섭리와 생존 경쟁이, 귀골과 천골이 
어떻게 다른가를 
사람도 아닌 개를 위하여 슬퍼하는 것이 정당한가, 잊는 것이 장당한가를 

그 차는 더 큰 슬픔을 싣고 가던 영구차였다. 
그때 명동에서 나는 더 급한 약속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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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태어나고 싶어 태어난 것은 아니다
그러니 죽을 권리라도 있어야 한다
자살하는 이를 비웃지 말라
그의 좌절을 비웃지 말라
참아라 참아라 하지 말라
이 땅에 태어난 행복, 
열심히 살아야 하는 의무를 말하지 말라

바람이 부는 것은 바람이 불고 싶기 때문
우리를 위하여 부는 것은 아니다
비가 오는 것은 비가 오고 싶기 때문 
우리를 위하여 오는 것은 아니다
천둥, 벼락이 치는 것은 치고 싶기 때문
우리를 괴롭히려고 치는 것은 아니다
바다 속 물고기들이 헤엄치는 것은 헤엄치고 싶기 때문
우리에게 잡아먹히려고, 우리의 생명을 연장시키려고
헤엄치는 것은 아니다

자살자를 비웃지 말라
그의 용기 없음을 비웃지 말라
그는 가장 용기 있는 자
그는 가장 자비로운 자
스스로의 생명을 스스로 책임 맡은 자
가장 비겁하지 않은  자
가장 양심이 살아 있는 자 

마광수 교수님의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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