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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광수 교수님의 시
이번 시는 더 울림이 있다.

슬픈 유족과 조객들을 싣고 장지로 가던 영구차는 

시골길에서 그만 개 한 마리를 치어 죽였다. 
작은 삽살개는 그만 아픔에 못 이겨 
깨개갱거리며 울다가 죽어 버렸다. 
영구차는 잠시 주춤 섰다. 그러나 다시금 목적지를 향해 장중하게 달렸다. 
죽어가는 개를 측은히 여기던 차 안의 사람들도 
차가 한참을 달려 개에게서 멀어지자 
다시금 관 속에 누운 고인을 생각해 내곤 
곧 개의 아픔을 잊어버렸다. 
고인을 위한 슬픔의 무게는 개의 죽음의 무게보다 더 컸다. 
내게도, 멀리서 점점 작아지며 들려오는 개의 깨갱소리가 
마치 바이올린의 고음인 양 아름답게조차 들렸다. 
내게도 고인에 대한 사랑은 컸다. 

며칠 전, 명동 뒷골목에서의 일이 생각난다. 
웬 거지 한 사람이 기운 없이 쓰러져 있는 것을 보고 
난 울컥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기느 들었다가 
아마 술에 취한 녀석일거야 하고 애써 자위하며 
슬쩍 눈길을 피해 지나가 버렸다. 
사실 난 그의 더러운 몸이 내 새 옷에 묻을까 봐 
겁이 났었다 난 귀찮았다. 
경찰이 어련히 잘 돌봐주겠지 생각했다. 
또 나에겐 급한 약속이 있었다. 

확실히 
한여름 대낮, 빌딩의 비좁은 그늘 아래서 낮잠을 자는
지게꾼의 더러운 얼굴에서 난 시를 읽을 수가 없다. 
한 마리 파리가 꾀죄죄 때묻은 그의 표정 속을 지나가고 
헤벌어진 입술 사이론 청계천만큼이나 찐득거리는 침방울이 흘러 내린다. 
아무리 내가 민주주의를 사랑한다고 해도 
더러운 걸인의 몸뚱이를 껴안고 시를 욀 순 없다. 또 
하찮은 개의 죽음을 위하여 눈물을 흘릴 여유는 없다.
고인을 애도하기 위하여, 더 큰 슬픔을 위하여, 다만 
그 차가 영구차이기 때문에 

언젠가, 무겁게 내리누르는 일상의 무게에 짓눌리어 
생활의 무게가, 고생의 무게가 
내게 시를 쓰게 한다고 그래서 
생활의 무게를 감수하겠다고 
비겁하게 공헌하던 것을 부끄럽게 기억한다. 
그런데도 
내게는 개의 아픈 비명이 바이올린 소리처럼 들리고 
그의 아픔이 실감되지 않았다. 
지게꾼의 고통이 실감되지 않았다. 

아아, 나는 모른다. 어떤 슬픔이 더 무거운 것인가를 
생활의 무게와 시의 무게가 어떻게 다른가를 
철학과 생활이, 사랑과 동정이, 신의 섭리와 생존 경쟁이, 귀골과 천골이 
어떻게 다른가를 
사람도 아닌 개를 위하여 슬퍼하는 것이 정당한가, 잊는 것이 장당한가를 

그 차는 더 큰 슬픔을 싣고 가던 영구차였다. 
그때 명동에서 나는 더 급한 약속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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